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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피스의 아이들

- children of chainpe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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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ldren of chainpeace -


레베카는 어린 딸이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이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아마 딸이 성인이 되면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베카는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항상 집을 비우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능력을 인정받아 황도로 부임을 받았다.

함께 가자고 했지만 사막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끝끝내 거부했다. 카르텔의 위협도 뿌리 깊은 차별 앞에서는 작은 고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홀로 가버렸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다. 고향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웃었다.

졸지에 아버지가 없어졌지만 레베카는 기 죽는 법이 없었다.

골목대장 자리를 두고 나이가 많은 제이와 싸우면서 물러선 적이 없었다. 자기보다 어린 애가 바득바득 덤벼드는 꼴에 화가 난 제이에게 많이도 쥐어박혔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기어코 항복 소리를 받아내었다.

멀리 간 아버지는 계속 연락을 취해왔다. 어려운 책도 많이 보냈다. 어머니는 그걸 시장에 내다팔아 먹을거리나 무기를 사오곤 했다.

무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레베카는 늘 어머니 편이었지만 몰래 아버지의 책을 빼돌려 숨어서 읽기도 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낌새가 수상하던 카르텔이 바다 건너 황도를 습격했다. 마을사람들은 카르텔을 미워했지만 그렇다고 황도 편은 아니었다. 어른 몇몇은 카르텔이 자랑스러운 혁명군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골이 깊었다. 마을에는 레베카 말고도 군인의 자식이 한명 더 있었다.

운이라는 꼬마였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밖에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운은 언제나 멍투성이였다. 레베카는 놀리는 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주었고, 운은 작은 강아지처럼 레베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이 차이가 나는 오누이 같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카르텔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마을 자경대를 이끌었지만 카르텔의 습격에 맞서다 크게 다쳤다. 울먹이는 딸의 눈동자 속에서 남편을 보며 숨을 거둔 어머니의 마지막은 무척 애처로웠다.

이렇게 레베카의 소년기는 끝났다. 연락이 귾긴 지 오래된 아버지를 찾으러 갈 수도, 갈 마을도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숨겨둔 무기를 꺼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체인피스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이때였다. 작은 평화(peace)가 엮이면 끝내 평화가 오지 않겠냐는 말에 제이가 유치하다며 웃었다.

"조각(piece)이 나지 않게 열심히 해보자고."

초기 멤버는 레베카와 제이, 운 세 명이었다. 키가 어른만큼 큰 제이가 리더가 되었다. 레베카가 운과 함께 숨어들어 정보를 캐내면 제이가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장난 수준이었지만 무법지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활약을 펼쳤다.

군은 체인피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이름이 알려지자 갈 곳이 없는 또래들이 몰려들었다. 메이윈도 이때 체인피스에 가입하였다. 카르텔에 질린 어른들이 무기와 먹을 것을 보태주었다.

웨스피스군 역시 지원을 늘려주었다. 인원이 많아지자 군이 맡기는 일도 점점 더 다양하고 위험해졌다. 다치는 일은 잦아졌지만 그만큼 성과가 쌓였다.

이대로라면 카르텔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애 착각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전기를 먹는 괴물이 나타났고, 카르텔은 다시 바다를 건넜다. 황도군의 전선이 점점 밀려난다는 소식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이즈음 제이가 이상했다. 가까이 지내던 몇 명끼리 숙덕거리며 돌아다니더니 급기야는 군기를 세운다며 친구를 때리기까지 했다. 외부 활동이 잦았던 레베카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았다.

둘은 크게 싸웠고, 제이는 체인피스를 탈퇴했다. 리더는 레베카가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온건하고 진지한 레베카를 무척 좋아했다.

제이가 나간 후로 카르텔의 추격이 더욱 교묘하고 정확해졌다. 몇 번이나 사로잡힐 뻔했다.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추궁 끝에 내통자를 색출해 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아이들은 배신자는 죽여야 한다고 했고, 레베카는 고민 끝에 본거지를 먼 곳으로 옮겼다. 이 와중에 로이라고 하는 이상한 아저씨를 만났다.

로이는 이상한 남자였지만 잔해를 가지고 뭔가를 둑딱뚝딱 잘도 만들어내었다. 몇 번의 위기를 그의 발명품 덕으로 넘겼다. 너댓 달을 머물며 도화주던 로이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황도에서 황녀가 납치되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함께 카르텔에 항거하던 많은 어른들이 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투지는 급격히 꺾이고,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식상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황녀를 납치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황도를 아주 끝장내려는 카르텔은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병사로 썼다. 살아남으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풀고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지쳐갔고,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레베카는 친구들 앞에서는 여전히 당찼다. 그러나 남몰래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황도로 가길 거부했던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은 각자의 길을 걸어간 것뿐이야. 나도 마지막까지 내 길을 걸어가면 돼."

그게 레베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레베카의 걱정은 오로지 친구들의 안위에 쏠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점점 표정을 잃어가는 운이었다.

진짜 동생처럼 따르고 도와주던 운이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몇 시간이고 멍하니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나온 운은 아직도 어린애였다.

외딴 마을에 보내주려고 해도 자기 살기도 힘든 세상에 아이를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게 미안하여 운의 생일에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주었다.

위로할 마음도 있었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던 탓이기도 했다. 끈적거리고 피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은 열병처럼 레베카를 괴롭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잘도 들어맞는다. 화염과 비명이 가득 찬 동굴을 빠져나오다 오랜만에 제이와 마주친 레베카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아버지와 꼭 닮은 웃음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체인피스의 아이들은 레베카를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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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천애 고아였다. 가족은 없지만 노래를 잘하고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 어렴풋이 가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가수보다는 총잡이가 더 멋진 꿈이었지만 총성이 귀를 따갑게 했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유명한 가수가 옆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구경을 갔던 제이는 하마터면 카르텔에 잡혀갈 뻔했다. 또래보다 키가 컷던 탓에 다 큰 애로 보였던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고, 결국은 악보를 불태웠다. 12살 때의 일이다.

이 무렵 제이는 곧잘 골목대장 노릇을 하곤 했다. 제이보다 더 큰 아이들은 시시한 놀이에서 벗어나 사격을 익히기 바빴기에, 대장 자리는 언제나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여자애가 덤벼들기 시작하고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악으로 똘똘 뭉친 여자애 하나 때문에 골목 싸움의 양상이 바뀌어버렸다. 단순한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패를 나누어 제법 그럴싸하게 전쟁을 치르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찼으나 아주 진지하고 숭고한 싸움이었다. 마지막에는 꼭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는 게 문제였지만.

이렇게 마을의 사고뭉치로 명성을 떨치던 제이였지만 나름대로 기준은 있었다. '낭만에 부합할 것.' 유명한 총잡이 모래바람의 베릭트가 세운 규칙이었다. 좋은 노래 소재라고 여기던 것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은 것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골목대장에 집착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6살짜리를 발로 차는 술주정꾼에게 덤벼들었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체인피스를 만들어 카르텔에 대항하겠다는 레베카에게 찬성했다.

그러나 '낭만'이 낡은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낭만은 결국 본심을 숨기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골목대장에 집착한 것은 오기였지만 레베카의 계획에 동참한 것은 살길이기 때문이었다.

카르텔은 일할 나이가 된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갔다. 아직은 마을 사람들이 카르텔을 쫒아내고 있지만 길게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뻔했다.

체인피스를 창설하여 마을을 나온 세 명은 갈 곳이 없었다. 말이 좋아 총잡이지, 보호자 없는 가출 소년이었다. 함부로 의용군에 들어갔다가는 총알받이로 써먹힐 게 뻔했고 언제까지나 사막을 배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이는 황도까지 밀려났다가 겨우 돌아온 웨스피스군에 접촉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외톨이였다. 무법지대 사람들은 카르텔을 두려워 했지만 군 역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제이는 '무해한' 여자애와 꼬마에게 정보를 모아오도록 시킨 후 잘 골라내어 군에 팔았다.

지역 정보원이 절실했던 군은 마뜩잖아하면서도 제이의 거래에 응했다. 어른들과의 협상은 어려웠지만 제이는 그래도 나름 잘 해냈다. 보수로 받은 돈을 모아 이 사막의 섬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웨스피스군은 기껏 들어온 정보원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레베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 잔뜩 쌓여갔다.

군의 간부가 펼치는 달콤한 회유가 무서운 협박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바카의 아버지를 이용할까 싶기도 했지만 자칫했다가 레베카만 뺏기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카르텔의 물자 부족을 잘 알고 있었던 천계 지도부는 버린 땅인 무법지대의 평화 유지에 큰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했다.

모자란 군비 지원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웨스피스군이 레베카를 알아본다면? 순순히 레베카를 아버지에게로 보내줄 리 없었다. 보나마나 더러운 방식으로 레베카를 희생하여 지도부를 자극할 것이 뻔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체인피스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유명해졌다. 웨스피스군은 카르텔에 대항하는 아이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웨스피스군은 선전용 모델을 요구했다. 어떻게든 레베카의 이름과 얼굴을 숨겨야 했기에 운을 대신 보여주었다. 제 몸만한 총을 메고 다니는 어린아이의 사진은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기사로 뽑혀나갔다.

바다 건너 사람들은 제 편할 대로 굴었지만 아이에게는 약했다.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신이 난 웨스피스군은 체인피스를 이곳저곳에 잘도 써먹었다.

천성인지 자란 환경이 좋아서인지 레베카는 이런 사정에 영 둔감했다. 모범생 타입이었다. 작전을 성공시키고 사람들을 구하면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제이는 레베카의 전술이나 총 솜씨는 칭찬했지만 너무 우직하다며 한탄했다.

웨스피스군의 선전 때문에 체인피스의 멤버는 늘어났다. 셋만으로도 버거웠는데, 어른들은 어서 덩치를 키워서 멋진 영웅담을 펼쳐보이라고 강요했다.

그래도 그만큼 지원이 늘었기에 틈만 잘 노리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며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실로 어처구니 없기까지 하다. 천계의 괴물이 나타나 전기를 빨아먹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웃어 넘겼지만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았다. 조금씩 들어오던 지원은 끊기고, 웨스피스군은 꽁꽁 틀어박혔다.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졌다.

카르텔은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산골 마을의 우물 물까지 쪽쪽 빨아먹은 그들은 다시 황도를 습격했다. 정규군의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날아오는 소식은 족족 패했다는 이야기뿐이었고, 나중에 이마저도 듣지 못했다. 제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살기위해서 제이는 다시 움직였다. 뜻이 맞는 몇 명과 함께 도둑질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붙잡혔다. 자신을 붙잡은 카르텔 병사는 다름아닌 고향 마을의 어른이었다. 간신히 도망쳤지만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레베카에게 꼬투리를 잡혀 크게 다투었다. 골목대장 싸움을 하던 때처럼 끈질기게 파고드는 레베카가 너무 밉고, 화가 나고, 미안했다. 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기던 것도 자신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하는 운을 보고 무너져버렸다. 고향에서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아형아'거리며 잘 따르던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베카와 운만은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 남으려고, 지키려고 싸웠다.

카르텔이 싫었고 비겁한 어른이 미웠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어 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담하고 낯뜨거워서 더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체인피스를 떠났다. 도둑질에 가담했던 몇몇이 말없이 따라왔다.

친구들을 두고 떠나던 밤, 제이는 새카만 하늘을 보며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체인피스를 만들자는 레베카를 말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수의 꿈을 접지 않았더라면? 무법지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몰려드는 상념은 신기루보다 허망했고 사정없이 불어대는 모래바람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 레베카와 운을 만날 일은 없겠지, 생각해보면 그 둘이 자신의 가족이었다. 부디 평화로운 날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제이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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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몸을 숨기고 사냥감에게 접근하여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는 법을 배운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철들기 전부터 총을 들었던 것과, 아버지의 실력이 좋았던 것은 기억난다.

좀도둑도 쓰지 않는 조잡한 총알은 술보다 쌌다. 운은 작은 동물을 잡으며 아버지의 술값을 벌었다. 군인인 어머니는 집에 잘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군인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버지가 왼다리를 잃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곧잘 운을 때렸고, 그런 날은 집에서 쫓겨나 별을 보며 잤다.

여린 피부는 늘 푸르죽죽 멍이 들어있었고 짐승의 발톱에 긁힌 상처 때문에 따가웠다. 마을 어른들은 매정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센 아버지를 말릴 정도로 바지런하지도 않았다.

동네의 큰 형이었던 제이가 아버지에게 맞는 운을 구해주었고, 대찬 성정이었던 레베카의 어머니가 집으로 운을 데려와 씻기고 밥을 먹여 주었다. 레베카는 운을 귀찮아하면서도 제법 챙겨주며 누나 노릇을 했다.

그 나이엔 언제나 동생이 갖고 싶은 법이라, 어머니를 뻿기는 것도 참아주었다. 운은 싹싹하고 애교도 잘 부려 귀여움을 받았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하지만 꼬마 운의 모범적이고 밝은 성격은 난폭한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탓이었다.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무리하는 운을 보며 레베카의 어머니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레베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끝나버렸다. 레베카와 제이는 카르텔에 맞서겠다고 했고, 운은 바득바득 우겨 끼어들어갔다.

어른과 싸운다는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두 명과 멀어진다는게 너무 무서웠다. 마을을 떠나던 날, 레베카는 같은 성(姓)을 쓰자는 제안을 했다.

제이는 비웃으면서도 갖가지 성씨를 늘어놓으며 물러섬이 없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둘은 라이오닐이라고 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운은 '운 라이오닐'이 되었다.

둘의 진짜 동생이 된 것 같아 그것만이 기뻤다. 나중에야 이 십 대 소녀가 정말로 원한 것은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가명이었다고 깨달았다.

체인피스는, 비록 그 의기는 좋았지만 금방 무너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여론 조성에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웨스피스군은 그들이 죽지 않을 정도로 지원하며 활약할 기회를 주었다.

운은 뛰어난 저격수였다.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지만 가까스로 해나갔다. 훨씬 연상인 두 명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 '카르텔과 싸우는 어린 영웅들'의 뉴스는 동정과 분노를 일으키는 재밋거리였다.

'꼬맹이 라이오닐'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때였다. 상처가 클수록 반응은 격렬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쌍하면 도와주러 오면 될 텐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바다 건너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보며 우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제이는 웨스피스군과 접촉할 때마다 운을 데리고 다녔다. 종군기자라도 만나는 날이면 꼭 양 무릎이 깨지곤 했기에 운은 군인이 무서웠다. 그래도 지기 싫어서 큰 소리를 치고 다녔다.

어쩌면 군인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운은 어머니의 생사를 모른다.

체인피스에서 운은 늘 막내였다. 어릴수록 나이는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기에 제이와 레베카는 운에게 '누나'나 '형'이란 호칭을 빼고 부르게 했고, 작전 회의에도 꼭 데리고 다녔다.

반발하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상 최상위권인 사격 실력 덕분에 운을 무시하는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체인피스를 이끌던 제이가 탈퇴한 후 레베카가 리더가 되었다. 안톤이라는 괴물의 등장과 황녀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가 겹쳐지가 아이들을 압박하는 현실은 더 가혹해졌다.

좋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힘들었다. 카르텔의 횡포는 점점 심해졌고, 도망친 친구들은 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시체로 발견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리더인 레베카 덕분이었다.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궂은 일을 도맡아하고, 밤새워 작전을 짜 먹을 것을 구하거나 때로는 카르텔의 공격에 맞선 레베카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영웅적이었다.

운은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혹은 그날 자신이 레베카를 구했더라면 전쟁이 좀 더 쉽게 끝났을 거라고 수만 번도 생각했다. 하지만 구조된 것은 레베카가 아니라 자신이고, 레베카는 지금까지도 실종 상태다.

기억을 헤집어 레베카의 단서를 찾고 싶어도 그 중요한 날에 남은 기억은 별로 없다. 단편적인 조각뿐이다.

붉은 하늘. 외침과 폭발. 죽어가는 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업는 레베카.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누가 배신을 했고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이제와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그날 모두 잃어버렸다. 운은 그날을 자신의 기일이라 여기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몸뚱이가 살아있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져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오직 레베카의 한마디 때문이다.

자기 어머니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주던 날의 일이었다. 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베카는 우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좀 늦은 말이지만 아빠가 보고싶어."

레베카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체인피스에서의 일은 누가 땅속에 파묻기라도 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데, 레베카의 목소리는 생생히 남아있다.

살아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었다는 확증도 없다. 그렇기에 운은 가느다란 희망 한 가닥을 품은 채 쉼없이 싸웠다.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고 십 대 소녀인 레베카가 평화로운 하늘 아래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 웃을 수 있게. 그 눈부신 광경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운은 계속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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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을 쓰러뜨리고 겐트에 돌아온 후에도 군인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치안이 회복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천계 군인의 주 임무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치안 유지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인구가 적어 세세한 조직을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없기에 지금까지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화로워야 할 겐트에서는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라드에서 올라온 모험가가 일으키는 작은 다툼에서 전쟁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도둑떼 발생까지, 모두 지친 군인들이 담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랬기에 잭터는 큰맘 먹고 내준 휴가를 이틀도 못쓰고 돌아온 부관을 보고 난감해졌다. 윽박질러서라도 쉬고 오라고 해야겠지만, 체계를 새로 만들려는 겐트 사령부에서 그가 빠진 이틀이 워낙 아수라장이었던 탓이다.

사령관의 고민도 모르고 복귀 절차를 마친 운은 언제나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감탄을 샀다. 상관이 쉼으로써 사령부 내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의 부하 몇몇만 작게 투덜거렸을 뿐이다.

식사와 시간을 빼고 사흘 내내 일을 처리한 끝에 간신히 일단락을 마친 운은 비틀거리며 집무실 옆 자료실로 가, 긴 의자 위에 쪼그려 누웠다. 부하들이 출근하기 전에 잠깐 쉬어둘 생각이었다.

오후에는 장성들을 모시고 병원에 위문을 가야 했다. 귀족들에게 모자란 병원을 더 지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목적이 무엇이든, 엉망인 치안을 고려하면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일정이 아닐 수 없다.

무리한 탓인지 채 낫지 않은 상처에서 열이 올랐다. 그건 상관없지만 10여 년 전부터 때때로 들리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지키지 못한 부하에서 쓰러뜨린 적까지 다양했다.

긴 전쟁을 겪은 이 나라의 많은 군인들은 운과 비슷한 증상을 겪곤 했다. 부하들의 호소를 들어주면서도 운은 자신의 상태를 토로한 적이 없다. 타인에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의 위신에 누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기도 했고, 유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군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운은 많은 면에서 '정상'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뒤에 있는 것이 아군이라면 자꾸 경계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고, 체인피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을 참았다.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견뎌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체인피스의 생존자들이 하나 둘 도태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억지로라도 요령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해도 나아지지 않는 한 가지를 뺀다면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왓?!"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일어난 운은 아직 악몽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서있는 인영은 덩치 큰 카르텔 병사로 보이기도 했고, 타르탄 같은 괴물로 보이기도 했다.

"저... 운 대령님? 루카스 소위입니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편지가 쌓여있기래 드리려고... 주무시길래 나가려고 했습니다만..."

"...신입인가."

반사적으로 쥔 총에서 손을 떼며 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기 전에 빼놓은 탄창이 의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하군. 조금 뒤에 나갈 테니 먼저 가있게.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주겠나? 만에 하나 섞여 들리면 곤란해서...... 어쨌든, 부탁하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편지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가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가서야 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시계를 보니 세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쉰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있었다.

메이윈을 보러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인피스의 생존자가 다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며, 운은 자신의 상태를 남의 일처럼 진단했다. 창 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루카스 소위가 두고 간 편지를 뜯어보던 운은 메이윈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락하지 말자고 말한 것은 그쪽이었을 텐데. 급하게 썼는지 글씨가 날림인데다 내용도 짧았다. 메이윈은 와줘서 고마웠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중에 놀러 오라며 주소까지 적어 놓았다.

'이럴 땐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 편지를 뜯었다. 치안 유지 등을 이유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13세에서 16세의 소년병 자원 입대 모집안을 통과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웨스피스 사령부에서 보낸 편지였다.

사령관에게 전해야 할 내용이었다. 몇번이고 같은 내용을 읽던 운은 천천히 편지를 구겼다. 잠잠해졌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쟁쟁히 울렸다.

살려줘! 운!

운..., 운! 나 다리가 없어졌어... 아파...!

운, 제발... 도와줘! 너무 아파... 죽기 싫어!

운 라이오닐은 한참이나 머리를 감싼 채 자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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