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북

천계에 부는 바람

- New Generation Of The Highland -


천계군을 지휘하여 카르텔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던 최고 사제 벨드런이 세상을 떴다. 천계 백성들은 카르텔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큰 슬픔을 맞이해야만 했다.

자진해서 상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버이가 죽은 듯 곡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천계 지도부는 슬픔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안정을 위해서도 빨리 벨드런의 빈 자리를 채워야했다.

천계의 최고 사제위는 선대의 유언을 통해 계승된다. 화려한 계승식은 축제이기도 하므로, 다른 때 같으면 빠르게 진행되었을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벨드런 님이 서거하신 지 벌써 열흘. 슬슬 에르제 님의 계승식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전쟁의 피해를 빨리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최고 사제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만... 좀 더 기다려봅시다."

"웨인 공.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벨드런 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후계자로 그분을 지목하셨습니다.
그 뜻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다소 성급히 몰아붙이는 페트라 노이만의 말에 대귀족 안제 웨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가 무시한다고 했습니까? 다만 전쟁의 뒷처리가 급한 이 때에 너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는 어렵지 않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하시긴 하나 아직은 더 배우셔야 할 시기입니다."

좁지 않은 회의실이 한숨으로 채워졌다. 너무나 막중한 자리, 한시라도 비울 수 없는 자리. 하지만 여염집에서 나고 자란 어린애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하지만,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최고 사제가 과연... 이런 시기에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 별말 아닙니다. 그저 저 패악한 카르텔이 방자하게 황도에 쳐들어온 것을 생각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사제의 능력이 아니었지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워야할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테레사 슐츠의 말에 넓은 회의실이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찼다.

"분명 벨드런 님께서는 카르텔을 염려하시지 않았소?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직접 선봉을 이끄시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놈들을 무법지대로 쫒아내셨잖소."

"그렇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이었지요."

"......"

"자자, 모두 진정들 하십시오. 각자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테고 논의할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금은 먼저 상을 제대로 치르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날카로워지려는 분위기가 유르겐 가의 수장, 네빌로 유르겐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각자의 가문을 대표하는 자였으나,
그만큼 묵직한 발언권을 가진 자는 없었다.

하지만 유르겐은 자신의 뜻을 설파하기는 커녕, 격앙된 회의장의 분위기를 가라앉힐 뿐이었다.

"에르제 님의 나이가 어리신데 우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가지시게 하는 것은 아니될 일입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시지요."

"유르겐 공의 말씀이 맞겠구려. 그럼 저는 이만..."

"저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휴우. 말들이 많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왠지 지치는군요."

"이런, 제가 장군 앞에서 피곤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지요. 괜찮으십니까, 장군? 전쟁의 피로가 아직 채 풀리지 않으셨을텐데요."

"괜찮소."

귀족들이 회의장을 나간 후 남아있는 자는 유르겐과 대장군인 잭터 에를록스뿐이었다.
벨드런 사후 천계의 최고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섰으나,
잭터의 낯빛에는 한점의 교만과 기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법지대 출신으로 이 정도의 지위에 올라선 자는 없었다.
벨드런이 그를 황도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시골 촌놈이 곧 나가떨어지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글아이라고도 불리는 이 남자는 그런 험담쯤 가볍게 무시하듯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군인의 정점을 찍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말 한마디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치열한 정치판을 제 손금 보듯하는 유르겐이지만
잭터의 생각만큼은 읽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유감입니다. 벨드런 님께서 장군의 취임식을 보고 싶어하셨을텐데."

"시끄럽고 화려하기만 한 취임식 따위로 눈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니 오히려 다행이오.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겠소."

군인답게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어서는 잭터를 유르겐은 붙임성 좋게 따라붙었다.

"아, 사령부로 돌아가십니까? 저도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시지요.... 날이 참 좋군요. 이렇게 좋은 날에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 벨드런 님과 장군의 덕택입니다."

"나보다는 장병들이 애썼소."

"하하. 너무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병사들도 용감히 맞섰지만 훌륭한 지휘가 있었기에 그들이..."

큼직한 걸음을 옮기던 잭터가 자리에 우뚝섰다.

"유르겐 공.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시오.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귀족들의 기품있는 회화에는 익숙하지가 않소."

"대단찮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구름이 걷히니 햇볕이 들어 날이 참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구름은 저절로 물러가는 법이오. 조바심 낼 것도, 억지로 바람을 일으킬 필요도 없소."

날씨 이야기였지만 결코 날씨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자라면, 이 수라장 같은 다툼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라면
유르겐의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잭터의 얼굴에는
감정을 읽을 만한 아주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유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럼 장군, 저는 이쪽으로 가야하니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중에 장기나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그럽시다."

귀찮은 사람에게서 드디어 풀려난 잭터의 목소리에는 옅은 해방감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유르겐은 더 아리송해질 수 밖에 없었다.

- New Generation Of The Highland -


벨드런 사후 열닷새째가 되는 날.
잭터는 수행원도 모두 물리친 채 한 소녀의 방을 찾아 정중히 노크를 했다.

"에르제 님. 잭터 에를록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잠깐만요, 열어드릴게요."

깊은 고동색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키가 큰 장군의 허리에 겨우 닿을까 싶은 작은 소녀가 '긴장된 표정'이라는 훌륭한 견본을 보여주는 얼굴로 목이 꺾어져라 올려보았다.

"안녕하세요, 장군님. 오늘은 총 연습 안 하시나요?"

"하도 많이 쏴댔더니 손가락에 쥐가 내려서 말입니다. 가끔은 쉬어 줘야겠더군요."

에르제는 진심으로 놀랐다.

"네? 손가락에 쥐가 와요? 쥐는 총을 좋아해요?"

"하하. 그 쥐가 아니라 근육이 갑자기 당겨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아플 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에이 재미없어."

"벨드런 님이 돌아가신 후 힘들지 않으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린아이가 슬픔을 감출 때 으레 그러듯 하얗게 굳어버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았는지 에르제는 주저하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긴 무서워요."

"그렇지요. 저도 집에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저씨... 아니, 장군님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제 집은 웨스피스에 있습니다. 못 간 지 한참 됐군요."

"왜요?"

잭터는 어린아이에게 말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성격대로 툭 터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황도로 올 때 같이 가자고 했는데 고향을 떠나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내와 딸을 두고 왔지요. 많이 후회됩니다."

"음... 장군님은 제일 높은 장군님이니까 병사들한테 데리고 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좋겠군요.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났는데 제 가족 때문에 병사를 무리하게 움직일 수야 없지요. 병사들도 지쳤으니 집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겠다. 저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에르제 님이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었지요? 반년 좀 됐나요? 가족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네... 근데 안 보내줄 거죠? 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잭터는 딱히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린 소녀는 충분히 무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이곳에 오게 될 거라는 거... 왠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알고는 있었어요. 혼자 큰 방에 앉아 있게 될 거라는 거..."

"혼자는 아닙니다. 모두가 곁에 있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네에..."

에르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미 그런 겉치레 위로는 지겹도록 들은 터였다. 그러나 잭터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든 것이 힘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어도 괜찮습니다."

"아직은?"

"나중에는 기쁠 때 울고, 슬플 때 웃어야 하는 일도 생길 겁니다. 지도자의 자리는 언제나 고독해서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지요."

"그런 거 싫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을 바꿀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잭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말을 어린아이에게 해도 되는 것인가... 제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잭터는 에르제의 총명함과, 이 소녀를 후계자로 선정한 벨드런을 믿기로 했다.

"최고 사제라는 자리는 무척 불안합니다. 이 황국의 중심으로 떠받들어지면서도 황제는 아니며 실질적인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의심받고, 남이 필요할 때만 책임자의 책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당신이 짊어질 짐입니다."

"......"

"당신을 두고 허수아비, 혹은 꼭두각시라고 부르는 자가 얼마든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에르제 님. 그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부려먹기 쉬운 최고 사제가 아니라 황제가 되도록 하십시오."

"황제요?"

천계에서는 듣기 어려운 단어였기에 영민한 에르제도 그저 눈을 깜빡이는 수밖에 없었다. 잭터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는 모래로 쌓은 성처럼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귀족의 세력은 지나치게 크며. 권력의 중심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래서야 바칼처럼 강력한 적이 나타나면 금방 흩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모두 죽어버리겠지요. 그 전에 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하여 단단하게 뭉쳐주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하시면 되지 않나요?"

겁먹은 에르제의 애원 같은 물음이었으나, 잭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됩니다. 저의 사고는 전투로 굳어진 지 오래고, 타인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군인입니다. 제가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면... 뭐, 갈아엎기는 쉽겠습니다만 좋지 않은 선례가 생기고 맙니다. 누구나 힘으로 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요?"

"저는 귀찮은 게 딱 질색이라서요. 업무 마치면 바다도 보고, 술도 좀 마시고, 친구와 이야기도 해야하거든요. 황제는 그걸 못 해요."

앞서 열거한 다른 이유보다 노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듯한 잭터의 말투에 에르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에에... 저도 노는 게 좋은데."

"물론 에르제 님도 적당한 사람 잡아다가 자리에 앉히고 도망가 버려도 되겠지요.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에르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심히 생각하더니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제가 떠나버리면 다른 사람이 이 넓은 방에서 떨고 있어야 하죠? 그건 싫어요. 그리고 또... 아저씨가, 아차, 장군님이 이 나라에서 제일 세죠?"

"어쩌다보니, 네."

"장군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해볼게요. 이 나라가 위험해지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칠 테니까...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 근데 황제가 뭐에요? 최고 사제 친구에요?"

"옛날에 그런 게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과 사람을 잇는 자가 최고 사제라면,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강력하게 이끄는 사람이 황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이름에 '황국'이 붙는 것도 옛날에는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그건 좀 무서운데... 황제 말고는 없나요? 그 아래 거."

에르제의 진심 섞인 투정에 잭터의 말문이 막혔다. '황제의 아랫자리? 그게 뭐지?' 그 역시 황제라는 개념이 낮선 천계인이었다.

"음... 황제의 아래면 황녀 정도인가요."

"그럼 저 황녀할래요."

"하지만 황녀는 황제의 딸일 텐데요... 뭐, 황제의 자리는 성장하신 후에 오르셔도 되겠군요. 어차피 이 나라는 이름은 황국인 주제에 황제는 없었으니까 성인이 되기 전 과정이라고 말해두면 되겠습니다."

" 벨드런이 살아있다면 그게 뭐냐며 웃어넘어갔겠지.' 잭터는 갑작스레 사무치는 그리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락하신 걸로 알고 가보곘습니다."

"또 땡땡이 치러 가시나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제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나중에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물러가기 전에 경례를 하는 잭터를 어설프게 따라하던 에르제는 그가 방문을 열기 전에 퍼뜩 생각났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그의 군복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무릎을 꿇은 잭터의 귀에 소곤거렸다.

"있잔아요. 제가 황녀가 되면 장군님의 딸도 찾아줄 수 있겠죠? 그럼 저랑 친구 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제 딸은 에르제 님보다 나이가 많은데요. 어린애끼리 노는 건 상관없지만 언니 노릇을 하려고 들 겁니다."

"와아, 저 언니 갖고 싶었어요. 제 언니 해주면 안 돼요?"

천진난만한 에르제의 말에 잭터가 콧방귀를 뀌었다.

"제 딸이 황녀의 언니면 저는 뭐가 됩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함정 파지 마시죠.안 그래도 밖에 나가면 죽을 맛입니다."

"에... 치사해."

"어른은 원래 그렇죠. 그리고 어린애는 심심하다고 자꾸 찬 바람 쐬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황제든 황녀든, 즉위식에서 코 찔찔거리는 주군을 모시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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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에르제 님을 황녀로 추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적극 지지하는 바요. 이상이오."

에르제의 최고 사제 계승식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그저 귀족원이 형식상의 승인을 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아주 조용하고 엄숙한 자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천계의 최고 사령관인 잭터의 엉뚱하다 못해 기발한 선언은 평화로워야 할 회의실을 다시 한번 수라장에 밀어넣었다.

"황녀? 황녀라니..."

너무 당황한 탓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귀족들을 눈앞에 두고도 잭터는 태연스러웠다. 아니, 뻔뻔스럽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귀족들은 울화통을 터뜨렸고, 테레사 슐츠는 용감하게도 "제정신입니까?"로 시작하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얻은 것 하나 없이 잭터가 왜 이글아이라고 불리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잘못을 저지른 신병처럼 얼굴을 붉혔다.

"...흠흠, 당연히 매우 깊은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하여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전례라면 카르텔의 대규모 공격이 전례에 없던 일이오. 그렇지 않소? 적어도, 바칼의 압세 속에 수많은 역사책이 불살라진 이후에는 처음 기록되는 일이라고 들었소만."

"하지만 황녀라 함은 황제를 고려에 두고 있다는 말인데, 에를록스 장군은 이 나라가 어째서 황제를 버리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바칼이 스스로 왕 노릇한 것에 질려서라고 알고 있소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괴물의 독재체제에 긴 시간 고통 받았으며, 따라서 각자의 의견이 존중받는 체제를 유지 및 발전시키자고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를 내세우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어린 에르제 님이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어리지만 착하고 총명하시니 적절히 보좌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안 될 거라고 보오. 그리고, 중책을 맡을 수 있겠냐는건 무슨 뜻이오? 그분은 황제가 아니더라도 최고 사제의 자리에 오를 분이오. 이미 이 황국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시오. 그대의 말은 듣기에 따라 꽤나 불경스럽게 들리오만."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고 사제와 황제는 명확히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악습이라 판단하여 버린 것을 왜 다시 취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황하긴 헀으나 이 회의장에 모인 귀족의 수장들은 허투루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몹시 날카롭고 촘촘하게 잭터의 주장을 파고들었다.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이 잭터의 의도를 왜곡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제아무리 준비를 갖춰왔다고는 해도 하루아침에 달변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잭터가 준비한 재료가 모두 떨어지기 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유르겐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에를록스 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 사안은 저희 귀족원에서도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시지요. 귀족원 소집은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유르겐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제 예상보다 훨씬 저돌적이시군요. 좀 더 돌려서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요령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소만, 일부러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소."

"장군께서는 자신의 발언이 귀족원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고려하지 않으십니까?"

"실상 이름만 바뀌는 거잖소. 어차피 나라의 일은 최고 사제가 결정하는데, 그 이름이 황제로 바뀐다 한들 달라질 게 뭐가 있겠소?"

"다릅니다. 정치인은 조그만 것에 매달리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장군이 던진 것은 이곳의 판세를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닐 테지요. 그런 식으로 절 시험하지 마십시오."

잭터는 조용히 유르겐을 바라보았다. 네빌로 유르겐. 젊은 나이에 귀족원의 실세를 거머쥔 남자. 이름뿐인 최고 지도자를 제외한다면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잭터는 유르겐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잭터의 의도는 명확했고 큰 충돌이 일어날 것은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가장 반대하고 나서야 할 유르겐이 알듯말듯한 입장을 견지하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귀족의 수장이 황제 중심의 권력구조를 원한다고? 정말로?

잭터로서는 이런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됐다. 비단 벨드런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잭터는 그토록 무시하던 무법지대의 쓴맛을 본 지금이 아니면 이 나라가 바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작한 싸움. 유르겐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무튼 그럴 뜻이 있으셨다면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일이 복잡해지겠군요."

"나에게 찬성하는 거요?"

"장군의 말씀은 벨드런 님의 뜻이었지요?"

"...유언이었소만 어찌 아는 거요?"

"벨드런 님이 에르제 님의 이름에 '베가'를 붙여주셨을 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베가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황권 또한 가장 강력했던 황제의 이름이지요. 요즘 와서는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만."

"하여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군이 나서실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유르겐의 말에는 명백히 탓하는 뉘앙스가 배여있었고 잭터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벨드런 님의 뜻은 제가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네빌로 유르겐... 무슨 꿍꿍이인가. 귀족원의 뜻대로 흘러가는 천계를 황제의 강력한 통치 하에 두겠다는 벨드런의 뜻을 알아챌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 남자를 적으로 두기에는 에르제 님도 너무 어리고, 뒷받침해 줄 세력 또한 없다... 이거야 원.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이 훨씬 마음이 편하겠군.)

"유르겐 공이 도와주신다고 하니 더할나위 없이 강력한 우군을 맞은 것 같소. 하지만 이 일은 신중을 기해 진행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한가하십니까? 전에 말씀을 드렸던 술자리에 꼭 장군님을 부르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준비를 해두고 기다리겠으니 편하신 때에 부디 누옥에 왕림해 주십시오."

잭터는 정말로 대귀족의 집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나 불러주시니 더는 핑계를 댈 수가 없겠군.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들고 가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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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 전하 만세!"

"황녀 전하 만세! 부디 태평성대를!"


"아..."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십시오. 연설은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겁니다."

"네... 아, 아니 알겠소..."

즉위식이 결정을 항해 달려갈수록 어린 에르제의 얼굴은 보기 딱할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미리 연습한 대로 의연하게 행동했고, 최고 사제 겸 황녀의 즉위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큰 탈 없이 식이 진행되었다.

"꽤나 분위기가 좋군. 하필 벨드런의 뒤를 잇는 게 꼬마 여자애라 다들 말이 많았을 텐데 바람잡이라도 심어 놨나"

"그런 건 없습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유르겐은 심어놨을 거야. 이런 건 분위기가 중요한 거라고, 최고 사제에, 황녀라니. 누가 불안과 불만을 안 갖겠나? 하지만 구체화되기 전에 여론을 조성해 놓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게 되지."

"남이 뭐라 하든 결국엔 자기가 판단해서 행동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 군중이 모두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즉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집어쳐. 그런 발언은 지나친 낙관주의자나 바보가 하는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지. 삥다구 같으니라고. 귀족에게 휘둘리다보니 머리도 개머리판처럼 굳어버렸나?"

세븐 샤즈의 메릴 파이오니어는 잭터가 웨스피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다짜고짜 연구를 도우라며 쳐들어왔던 메릴은 잭터가 최고 사령관이 된 지금도 거침없었다. 긴 악연 탓에 이미 익숙해진 잭터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꼬박꼬박 받아쳤다.

"모험을 하겠다며 여기저기서 사고나 치는 당신에게 듣고 싶진 않군요. 그렇게나 참견하고 싶으면 아예 본격적으로 해보면 어떻습니까? 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쳤나? 과학자는 군대에 들어가는 순간 끝난 거야. 군인이란 놈들은 성급하고 결과주의적이고 잔소리가 심해.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 착오가 있는지 이해하질 못한다고."

"제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엔?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만큼 키워줬으면 됐지, 내가 언제까지 뒷바라지를 해야겠어?"

메릴은 곰방대에 쌈지 담배를 비벼 넣었다. 궁녀장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임을 들어 기어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마셨다.

"아참. 그러고보니 해안수비대 쪽에 헤르만의 제자가 활개를 치고 다닌다던데. 완전히 복수에 미친 놈이더만, 언제까지 군복을 입혀둘겐가? 겉으로는 서글서글해 보이면서 피를 좋아하는 놈이 가장 골치가 아픈 법이야."

"공이 많습니다. 대체할 인재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유심히 지켜보기는 하지요."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헤르만은 왜 싹수를 못 알아봤는지... 쯧쯧쯧. 뭐어 골치 썩일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야."

"훈장이 더덕더덕 붙은 놈하고 얘기하는 건 여기까지 해두지. 시간도 됐고 슬슬 가보겠네."


"즉위식은 지금 한창입니다만."

"흥미 없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답답해서 짜증도 나고. 젖냄새 나는 어린애한테 무거운 옷을 입힌 꼴도 보기 싫고. 이번엔 몇 년 정도 돌아다닐 셈이야.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나 없는 새 꼴까닥 가지나 말어."

"당신이 먼저겠죠. 할멈."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잭터에 메릴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껄껄껄! 이 세상이 나이 순대로 가는 세상이던가? 젊은이들 목숨 덕에 서 있는 주제에 착각은 하지 말자고."

메릴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날리며 휘적휘적 사라졌다. 괴짜이긴 하지만 인맥도 넓고 지혜도 깊은 메릴이 에르제 옆에 있으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수없이 말을 꺼내어봤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던 잭터는 가는 길에 무좀이나 걸리라는 상큼한 축복을 빌어주었다.

메릴이 가자 자리를 바꾸듯 다가온 것은 네빌로 유르겐이었다.


"생가보다 호응이 좋군요.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이 황녀님이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공의 노고가 크셨소."

"별말씀을. 장군이 황녀님을 적극 지지한다고 표명한 것만으로도 일이 이렇게까지나 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계시더군요."

"낯간지럽구려.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만둬 주시오."

적당히 겸양을 붙여 유르겐의 말을 자른 잭터였지만 속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자신을 흘끗 돌아보고 있는 에르제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조용히 자신 속으로 침잠했다.

( 벨드런의 말대로 고여버린 귀족원의 물을 갈아버려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하지. 이번 카르텔의 침입도 결국은 오랜 차별과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것. 그걸 불러일으킨 것은 귀족... )

( 답답하게 막고 있는 천장을 뚫어버려야 한다. 황녀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보내야해. 정말로 귀찮을 일을 맡겼군. 벨드런.. )


( 백성들은 귀족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최고 사제 중심의 권력 집중은 거스를 수 없을 바에야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

( 카르텔도 모두 소탕된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충돌은 일어날 것이다. 당분간은 군을 내 편으로 하되 모든 책임은 오롯이 황녀가 지게 해야 한다. '최고 사제' 겸 '황녀'인 만큼 책임을 묻기도 쉽겠지. )

( 말도 안 되는 신관 정치의 쓰레기는 황녀와 함께 치워버리고, 강력하고 정통성에 의심이 없는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이다... )

"오늘도 날이 참 좋군요. 새로운 왕이 일어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그렇군. 좋은 날이오."

유르겐과 잭터는 같은 하늘을 올려보며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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