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북

붉은 죄

- BLOODY SIN -


제국 협상단이 언더풋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경계당하지 않기 위함인지 호위하는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그 대장이 웨펀마스터 반이라는 소식이 주목거리였다.

제국을 싫어하는 흑요정들도 호기심을 참을 수는 없었던지 행렬이 지나가는 대로에 잔뜩 몰려나왔다.

나이트 로바토 : (반 발슈테트...)

잘난 척 손을 흔들고 있는 제국 귀족과 약간 거리를 둔 채 말을 몰고 있는 반의 얼굴은 그야말로 기사다웠다.

젊고, 자신만만하며, 절제된 행동거지 허리에 매달린 검이 부끄러울 지경인 협상단 대표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품격이 느껴졌다.

로바토는 자기도 모르게 귀수를 어루만졌다. 무거운 구속구가 매달린 검게 비틀린 팔. 귀수를 가진 것에 좌절한 적은 없으나 이 귀수에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한때 로바토는 저 의기양양한 제국 기사들의 동료였다. 강함을 중시하는 제국에서 귀수를 가졌다는 사실은 아라드의 다른 나라만큼 큰 흥이 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힘을 내는 귀수를 부러워하는 자가 있었을 정도다.

그런 환경 속에서 로바토는 비교적 탄탄대로를 걸으며 성장하였다.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았으나, 타고난 재능과 끈기로 남보다 쉽게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언제가 떠오른 의문이 가슴에 박히기까지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왜 제국은 이다지도 강함에 집착하는가? 왜 약한 이를 구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강함을 뽐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의문은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갔다.

로바토는 믿을 만한 동료 몇몇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우선 내가 먼저 강해져야지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그나마 가장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언젠가 기사단장은 로바토와 다른 단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었다.

"이 아라드는 썩었다. 질서가 무너졌고 법이 해이해졌다. 타락한 사람들은 탐욕을 위해 움직일 뿐이고, 몬스터는 이 혼란을 이용해 사람을 해친다. 그러니 우리가 곧은 법과 엄격한 잣대로 이 세상을 나락에서 건져올려야 한다!"

그 말은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흔들림을 단번에 멈춰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우리는 옳다. 아니, 우리가 옳다. 우리야말로 구원자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다! 이런 엄청난 사명을 받든 기사단 생활이 가혹했느냐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훈련은 고되었지만 충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수에는 관용이 베풀어졌고, 아픔에는 응원이 따랐다. 엄격하고 도덕적인 단장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투르지만 자상한 아버지 같았다. 단단하게 엮인 가족 같았다.

부모를 일찍 여읜 로바토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연대감이었다. 목숨을 건 임무도 이들을 위해서라면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소 경직된 기풍을 지닌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자유스럽고 화목한 분위기인 것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요즘 로바토는 그것이 황제가 노린 바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국, 정확히는 황제로 대표되는 황실을 위해 싸우는 정예군. 유대가 단단할수록 이단을 용서치 않는다. 로바토 역시 제국의 방향에 의문을 가진 것이 들통나 단장에게 불려간 적이 있었다.

크게 혼날 것이라며 겁먹은 신입 기사를 엄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단장은 갑자기 싱긋 웃었다. 백마디 호통보다 효과적이었다.

"기사단도, 제국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한 조직이 아니다. 황제 폐하도 그렇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잘못 생각할 때도 있고,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제국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토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거지. 높은 분들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지. 어쨌든 본질은 같다고 본다.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기 떄문에 때로는 지키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지. 네 말대로 약한 자를 구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그건 우리 기사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훈련을 하고, 경험을 쌓는다. 약한 자를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그런 와중에 가끔 본질을 잊고 잘난 체하는 바보도 있지만... 어딜가나 바보는 한둘 있지 않느냐? 네가 그런 놈들을 혼내주면 되는 거야."

신입 기사 로바토는 그날 이후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황제의 뜻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라드의 구원자인 제국이 더 많은 아라드인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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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처음 품었던 의문은 마치 반항기의 홍역처럼 잊혀졌다.

그런 '지루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도덕적 이었지만, 로바토는 결코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호전적이고 겁이 없어, 늘 앞장 서서 싸우곤 했다.

그래봐야 여자 힘이라며 비웃던 동료들도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이 뿜어내는 괴력 앞에 맥을 못추고 나가떨어졌다.

그럼에도 결코 자만하는 일 없이 꾸준히 수련을 계속했다. 그 성실함과 정의로운 성품은 그야말로 기사도의 화신이라고 할 만했다. 경험만 더 갖춘다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장이 로바토를 불렀다. 황제가 젊은 기사들을 각지에서 불러, 새로운 기사단을 만들 거라는 이야기였다. 단장은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말했고, 로바토는 그낭 당장 황금의 도시 비탈론으로 향했다.

수도 비탈론에 도착한 로바토는 새로운 기사단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였다. 제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기사단답게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이 매일 계속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명예 단장이라 자처하고 있었다. 젊은 기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로바토는 첫 임무를 앞둔 그날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황제에게 드디어 실력을 보일 기회. 흥분되지 않을 리 없었다. 기사된 자가 주군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아니던가.

어린애처럼 잠을 못 이루던 밤, 창 밖에 총총히 빛나고 있던 별빛은 응원의 메세지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깨달아야 했다. 기사의 가장 큰 영광을 '주군 앞에서의 활약'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약자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겠다던 맹세를 어째서 잊었단 말인가? 그 알량한 명예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공명심에 취해 황제의 인형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단 말인가?

기사단이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더 나은 제국의 미래를 위해 검을 들자.' 기사단은 강력한 무력집단이다. 그들이 할일은 이름뿐인 부단장에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침략해오는 외지인을 처단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 제국인이 살 땅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침략하였는지 여부는 알 바가 아니었다.

황제에게 불만을 가져 봉기한 자들을 베고 그 삼족을 멸한다.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봉기했는지 여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런 자들을 처단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무엇이 진정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황제에게 향하는 비난은 곧 기사단원 각자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개인적인 분노마저 품은 채 검을 휘둘렀다.

먼 타지까지 나온 귀족이 황제를 대표하여 치하하는 말은 언제가 같았다.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훌륭한 기사로다.' 정말로 강력한 최면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합리가 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라면 방해가 되는 돌을 길에서 치워야했다. 억울함과 슬픔은 돌을 치울 때 생기는 자잘한 생채기 같은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긴 출정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로바토는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의문을 고고한 애국심으로 밟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니 적까지 구하겠다는 그런 허울 좋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을 납득할 수 없었던 로바토는 기사단을 나오겠다고 말했다.

부단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갈 곳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니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구자들을 돕고 호위하는 일이라고 했다.

기사로서 제국을 바꾸어보고 싶었던 로바토는 잠시 망설이다가 추천서를 부탁하였다. 행동하기 전에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로바토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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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토가 가게 된 곳은 숲에 둘러싸인 넓은 실험장이었다. 평생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로바토로서는 휘황찬란한 설비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로바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연구원은 아라드에서 제일 가는 기술이라며, 이 기술이 유출되지 않게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험장의 경비 업무를 서고, 연구원들을 호위하는 일은 전투에 비하면 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했다. 휴양을 온 기분까지 느끼며 로바토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골똘히 고민했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자기 반성과 패기 넘치는 의욕에 빠져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인적이 드문 숲 속에 숨어있는 이유가 단순히 '기술 보안' 때문이라는 말을 도대체 왜 순진하게 믿었던 것일까.

언제부턴가 실험장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연구원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금지되었고, 로바토가 속한 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대신 바깥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커다란 나무 상자가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옮겨졌다. 간혹 들려오는 우는 소리는 실험용으로 끌려온 동물의 소리라고 얼버무려졌다.

어느 날 밤, 유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산책 겸 바깥에 나온 로바토는 실험장 안쪽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숨죽여 다가갔다.

통제 구역 안으로 들어갈 권한은 없었지만 사고가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기이한 곳에 도착하였다.

지금껏 멀리서 보아온 실험 장비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거대한 기계가 있었다. 원형의 고리가 얽히어 있는 듯한 그 기계는 바로 부서질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웅웅거렸다.

주변에 서 있는 연구원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설렘이었다.

로바토는 자기도 모르게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시끄럽게 돌던 기계의 중앙이 빛나는 듯하더니 이내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먼 곳에서 해가 뜬 것이라 착각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뿐만 아니라, 빛 속에서 불어나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상자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기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영문을 알 수 없어 주변을 둘러보던 로바토는 지금껏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들도 있었다. 재갈까지 물린 채 두려움에 떨고있는 그들의 팔은 붉은색이었다. 로바토의 숨이 턱 막혔다.

설마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구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빛을 내뿜는 기계가 아니라 그 아래에 꿇어앉고 있는 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귀수병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귀수로도 끊을 수 없는 단단한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제압당한 흔적인지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입에 재갈이 물려있어 무어라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분노와 증오로 치뜬 눈을 통해 그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

로바토는 벌떡 일어났다. 말릴 생각이었지만 기계에서 뿜어지는 빛이 한층 강해져, 그 일대가 온통 불길한 빛 속에 삼켜졌다.

시간이 조금 흘러 겨우겨우 눈을 뜨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기계 앞에 있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쇠사슬에 감긴 이상한 괴물이 있었다.

차마 생물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것은 말라버린 생성머리에 나무뿌리를 붙인 듯한 괴이한 모습이었다. 로바토는 물건 바꿔치기 같은 서커스의 기술을 떠올렸으나 그럴 리는 없었다.

하지만 뇌가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그때 누군가 로바토를 잡았다. 기겁하며 돌아보자 왠 여자 연구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입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적의는 없어보였고, 너무나 당황했던 로바토는 그 여자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뒤쪽에서 아득히 감탄과 한숨, 억눌린 비명이 섞이어 들려왔지만 욱씩거리는 귀수를 붙잡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로바토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 연구원은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말라며 경고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바토는 그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맥업이 돌아간 로바토는 자신을 잃었다. 제국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풋내기의 허세나 다름없었다.

도덕론은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거품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가?

이날 밤 이후, 주변의 모든 것은 달라져버렸다. 웃으며 지나가는 연구원들의 얼굴과 괴물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믿을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홀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뇌하고 망설이며 시간만 보내고 있던 중, 기밀 자료를 훔쳐간 도둑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의욕없이 수색에 참여했던 로바토는 그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멈춰섰다. 행색이 초라하고 비쩍 마른 그들은 모두 귀수를 가지고 있었다.

귀검사들은 악귀에 씐 것처럼 경비대를 향해 달려들었고 로바토는 싸움에서 의도치 않게 몇 명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과 함께 온 수색조는 모두 살해당하고 쓰러진 귀검사들은 악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로바토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명령은 절대적이다. 이들을 살려보낸다면 자신도 제국에 쫓기게 될 것이다. 귀수를 가졌으니 어쩌면 실험대상으로 끌려가 그 무서운 기계 앞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로바토가 살아서 이들의 적으로 서 있는 이유는 오직 제국의 기사라는 이름 덕분이었다.

로바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끔찍한 괴물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죽음과는 별개의 공포였다.

결국 로바토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귀검사들에게 숲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주고 뒤쫓아온 다른 수색대원을 베어 쓰러뜨렸다. 죽이지는 않았으나 배신자로 낙인 찍히기에 충분했다.

그날로 로바토는 제국 기사의 자격을 잃었다. 추적자를 피해 도망친 로바토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아라드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늘 긴장하고 살아야 했지만 그때 귀검사들을 도망치게 해준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언더풋에 온 것은 수배령이 조용히 없어진 후였다. 빌마르크의 연구원들이 비인도적인 실험을 하던 것이 발각되어 황제의 분노를 사, 모두 엄벌에 처해졌다는 소문이 쉬쉬하면서 퍼졌다. 진실은 시간 속에 묻혔다.

로바토는 상념을 떨쳐내고 이제 상당히 멀어진 반 발슈테트의 뒷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황제의 검이 되어 정의를 구현한 것이 웨펀마스터 반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과연 저 남자는 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 역시 제국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뻔뻔스레 그에게 충고를 해줄 수는 없다. 세상의 영웅이라는 평가대로 그가 제국을 바꾸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로바토는 몸을 돌려 행렬에서 빠져 나왔다. 자신의 손에 죽은 이와 간접적으로 죽게 한 모든 이들에게 사죄와 명복을 빌 생각이었다. 등에 짊어진 생생한 죄가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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